[Exhibition]한강건축상상전, '원효대교', DDP




원효대교, “Over the River and bridge the between”


전시               2014.09~2014.11,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

형식               영상(5:16), 갱지에 프린트, SST 슈퍼미러 설치물

업무담당        엄태산

#원효대교  #괴물  #한강  #DDP








도심을 가르며 흐르는 강이 있고, 그 강을 다시 남북으로 자르며 잇는 다리가 있다. 우리는 이 강을 둘러싼 도시 안에 살고, 그것이 쌓인 개인의 역사를 삶이라 부르기도 한다.

날과 날이 이어진 한 해가 지나는 동안 구별되는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강은 다른 모습이 된다. 물이 불고, 거칠게 휘몰아치는 강이 될 때면 이에 대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다, 겨울이 오고 강이 얼게 되면, ‘흐르는’ 강이 멈춰서는 현상을 경험할 수도 있다. 강은 땅이 되어 차갑지만 포근한 대지의 모습으로 사람을 부른다. 환상적 리얼리티.

삶의 배경이 되는 강에는 이렇듯, 현실 같지 않은 모습으로 현실의 맥락에 스며드는 힘이 있다. 쉽게 설명할 수 없지만 자연스레 나를 둘러싸는 모든 것들의 서사. 그 연결 고리 같은 바탕 공간. 삶의 정당성을 획득하게 하는 소중한 경험.

이처럼 사람과 사물, 모든 것들이 마주하며 여백으로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예의를 갖추고 서로를 환영하는 것. 우리는 이러한 (한강과의) 자연스러운 조우를 바라고 있다. 이에 작업의 한 예로, 하늘이 넓게 열려있고 수평선이 아름다운 원효대교 아래, 흐르는 강의 일부를 반듯하게 잘라내어 흐름을 멈춰 세우기도 한다.

개인의 삶에 기여하는 바탕 공간으로써의 한강. 그리고 그것을 잇는 다리로써의 한강. 공기처럼 들이마신 불편하지 않는 관계의 호흡처럼 그렇게 서로를 잇는 현실 속 환타지를 상상을 한다.




서울의 남과 북은 나뉘어 있다. 1.4km의 간극. 그 비어진 틈을 따라 동에서 서로 흐르는 41.5km의 물줄기가 바로 한강이다. 비워진 땅을 채운 것이 강이라면 그 강물로 나누어진 두 개의 땅을 이어주는 것은 그 강의 다리다. 하지만 그 다리는 하늘과 강을 다시 수평으로 나눈다. 이러한 우연과 필연의 반복 속에서, 마치 강과 다리가 수직으로 교차하지만 결코 서로가 만나지는 않는 것처럼, 한곳에 공존하지만 서로 이웃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탐구가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이다.

오브제에의 작업은 자신의 나르시스적 복사판으로 남겨지거나 다른 풍경으로의 대체물로 의도되기 십상이다. 풍경 속의 오브제. 오브제들로 이루어진 풍경. 여기서 덧셈이 아닌 뺄셈은 주체와 주체 간의 숨겨진 관계를 드러내는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부재를 통한 존재 증명. 사라짐 속의 드러남. 주체의 한가운데를 비워내기. 이것이 뺄셈의 또 다른 공식들이다. 증가되고 더해진 주체들의 합이 결코 그 전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셈법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반증과도 같다. 경계란 이것과 저것 사이의 보이지 않는 틈새이다. 번잡한 도심 속 한강 주변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심연이 있다면 그 깊이가 바로 그 틈새의 폭이 된다. 뺄셈의 전략은 그 경계에 주목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실체 자체보다 실체가 존재하는 방식에의 관심이며 그 실체의 여백에의 살핌 혹은 배려가 된다.

원효대교는 여의도에 가면 항상 거기에 있다. 81년에 준공된 교량이니 서울시민들은 30년을 넘게 그것을 이용해왔고 지켜봐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곳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인프라(infra)라는 것이 바로 그렇다. 인프라는 일단 한번 만들어지면 꽤 오랜 시간을 버텨간다. 또한 한강이 오브제가 아닌 것처럼 인프라 역시 오브제가 아니다. 바닥에 깔리거나 바닥 아래로 깊숙이 숨겨지는 수도나 전기 매립관이 그렇다. 언제나 필요로 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의 존재는 잘 인지되지 않는다. 마치 사람으로 치자면 얇은 피부 아래 숨겨진 모세혈관과도 같다. 그러나 우연히 상처라도 나서 피부가 벗겨지기 전까지 우리는 전혀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한 인프라의 은폐성으로 인해 일상생활의 표면은 유지된다.

평일이면 출퇴근을 위해 원효대교 위를 자동차의 속도로 왕복하고 주말이면 자전거로 원효대교 아래를 통과하며 여름이면 원효대교가 만든 커다란 그늘 밑에서 뜨거운 태양 빛을 피하기도 한다. 교량의 표면을 밟고 교량을 수직 관통하며 교량을 지붕 삼아 임시 거주하는 동안에 교량과 우리 사이에는 다양한 주객 관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이 모든 관계의 출처는 분명치가 않다. 교통수단으로 만들어진 원효대교는 그것이 자리 잡은 장소에 존재하는 여러 다양한 요소들과 겹치고 얽히는 시간의 경과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우리의 눈에 항상 흐릿하게만 보인다.

한강의 교량은 서울 내에 있는 그 어떤 구조물보다도 크다. 그 길이만 한 높이의 건물은 아직 없으며 그런 무게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바닥에서, 그러니까 교량의 남단과 분단의 둔치뿐 아니라 한강의 수면에서부터 수많은 거대 기둥들로 들어 올려진 구조물 또한 없다.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인 원효대교를 멀리서 바라보면 장대한 스펙터클로 보인다. 스펙터클에는 항상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거리감이 존재한다. 그것은 실재적 거리이기도 하지만 심리적, 심정적 거리이기도 하다. 개입이 배제된 시선은 거리의 멀고 가까움과는 상관없이 보이는 모든 것을 그저 하나의 풍경으로 만드는 데 그치고 만다.

이것은 이미지를 통한 작업이다. 이미지는 허상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허상을 통해 실체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모습이 더욱 명확해지길 기대한다. 땅과 땅을 이어놓은 지평선 같기도 하고 하늘과 강의 경계를 이루는 수평선 같기도 한 한강의 교량. 하나의 이미지와 다른 하나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바로 그 순간마다 대상은 우리에게, 우리는 대상에게 각자의 이름으로 포획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작업이 우리의 시선을 넘어서는(meta) 풍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표상을 포섭하지 않는 상상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