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idential]포천주택 (소담재)




포천주택


설계 및 감리   2020.08 ~ 2021.10

면적               150㎡ 

용도               단독주택

구분               신축

협동               구조설계(이든구조), 시공(공디자인), 사진촬영 (남궁선)

업무담당        민경현, 박진영

#포천주택  #단독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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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비평> 

생산(production)과 창작(poiesis): 기하학적 순수성과 삶의 열망

백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4.9미터의 폭과 33미터의 길이를 가진 길다란 박스! 크지 않은 150여 제곱미터의 주택임을 생각해보면 얇은 폭으로 30여미터 이상을 내달리는 박스 형태는 드문 일이다. 동서방향으로 대지를 가로지르는 기하학적 간결함이 돋보인다. 단순한 박스인 것 같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과감한 변형이 자리잡고 있다. 모니터상의 선으로만 존재하는 순수기하학을 중력에 버티어 서고 옷을 차려입은 몸체로 지어내는 구축, 터의 기운과 풍경을 읽고 펼치는 대응, 마지막으로 삶의 다양한 열망에 대한 부응 – 기다란 박스의 기하학에 이런저런 변형이 가해진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노출콘크리트 구조체와 벽돌, 다양한 위치, 높이, 형태를 한 창호와 문, 출입구와 중정을 삽입하기 위한 절개, 단층의 박스에 수직방향으로 달라붙은 곡면 볼륨, 따낸 동서측의 코너. 모두 박스의 명증함, 순수함, 균질함을 깨고 조금씩 삶의 양상을 담아내는 ‘건축’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형들이다. 특히 곡면형상으로 덧대어진 볼륨은 단층 주택의 평이함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공간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파격적인 순간을 삽입한다. 다락방을 탄생시키고, 샛문을 뚫어 옥상 테라스로 이어준다. 다락방의 눌리는 듯한 동굴 같은 느낌과 테라스의 탁 트인 개방감이 상호대조를 통해 서로를 빛나게 만든다. 마치 이것 없이는 저것도 없다는 듯이, 연접하며 서로 다르기에 자기도 살고 상대방도 살아나는 모양새다.

 

곡면 볼륨이 덮고 있는 공간은 다락방, 하부의 키친, 그리고 2층 층고를 가진 식당이다. 드높은 곡면 천정 아래 자리한 식당은 스카이라이트에서 들어온 은은한 빛을 기조로, 그리고 동측과 남측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생생한 빛을 오전과 이른 오후면 받아들인다. 기하학적으로는 박스의 동측 끝단에 자리하기에 주변부에 속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중심이다. 수직으로 확장된 공간의 웅장한 볼륨을 확보하고 있고, 복도, 앞마당 테라스, 다락방, 옥상 테라스 등 내외부 공간을 좌우로, 그리고 위아래로 불러 모은 것이 마치 바람개비의 중심 같다.

 

33미터의 길이를 따라 놓인 1.4미터 폭의 복도 또한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기념비적인 것이다. 지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빨리 지나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머물러야 하는 평이한 복도가 아니다. 서가가 놓인 도서관이자 커피를 마시는 바이며, 그림을 거는 갤러리이기도 하다. 바깥의 풍경을 좁고 긴 창을 통해, 그리고 탁 트인 전면창을 통해 담아낸다. 연결통로이지만 동측 코너에는 조그마한 서재가 자리잡고 있고 서측 끝단은 문을 닫아 놓으면 안방과 하나가 되기도 한다. 식당과 만나는 부분은 복도라기보다는 식당의 폭을 전면으로 확장시키는 경계벽이 되기도 한다. 4.9미터의 폭을 1.4미터 복도와 3.5미터의 실, 이렇게 2개의 띠로 명료하게 나눈 것 같지만, 한편으로 둘은 서로 분리되기도 하고 묶이기도 한다. ‘복도이면서 복도가 아님’을 또는 ‘복도 아닌 복도’를 구현한 다의성과 다가성이 실현되고 있다. 복도, 방, 도서관, 카페, 식당, 서재 등 명료하게 구분된 범주를 교란하여, 틈새를 파고들고, 관습적 현실이 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이것이 저것이 되는’ 은유의 산물이 바로 ‘복도 아닌 복도’이다. (그러고 보니 은유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단 한 순간도 저버릴 수 없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추동력이라고 이야기한 니체가 떠오른다. 범주의 감옥에 갇혀 은유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잠시 멈춘 것 같은 21세기에 ‘복도 아닌 복도’는 건축 창작의 지향점 하나를 보여준다. 범주가 가리던 틈새를 뚫고 들어가서,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던 다의성의 순간을 포착하고, 경험해 보지 못한 생생한 은유의 공간과 삶의 방식을 현실 세계에 펼쳐 보이는 것.)

 

기다란 박스가 터에 놓이면서 다양한 질적 차이들이 교묘하게 만들어졌다. 두 단 겹이 진 대지의 상단에 자리잡았다. 사람을 끌어올려서 높은 곳에 서게 한 후, 그리고 다시 몇 단을 올라 더 높은 곳에 서게 한 후, 닫힌 문이 아닌 얇은 복도를 넘어 근경과 중경이 생략된 드라마틱한 원경의 산세가 그림처럼 다가오는 진입방식이 이 배치 때문에 가능해졌다. 전면으로는 복도를 두고, 눈 높이에 띠창을 쭉 내어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과 이웃에 대응한다. 너무 개방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폐쇄적이지도 않은 균형을 잡아내고 있다. 마을을 포용하면서도 동시에 거리감을 잡아내고 있다. 후면으로 돌아가면 반전이 일어난다. 동쪽 코너를 과감히 따 내었다. 파인 코너 부분은 식당으로 이어지는 문이 달려 있다. 전면 마당은 벽돌을 촘촘히 깔고 테이블을 놓았다. 정성을 다해 벽돌로 마무리한 바닥, 전면창을 통해 식당이 들여다보이는 개방감, 식당과 키친으로 쉽게 이동이 가능하도록 배려한 동선, 그리고 그늘진 툇마루 역할을 할 코너! 주택의 전면을 지나 후면으로 진입하면 나타나는 이 환영의 풍경은 전통 한옥의 마당을 떠올리게 한다. 신발을 벗고 굳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주인이나 손님이나 서로 간에 부담이 덜한 다목적 환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갈 사람은 안쪽 계단을 따라 내부로 진입하는 것 또한 전통 한옥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유사하다. 신발을 신은 채로 들어오는 손님을 ’마당에서 맞이함’과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임’ 사이의 미묘한 조율이다. 추적추적 신발에 흙이 달라붙을 법한 날에도 촘촘히 벽돌이 깔린 앞마당을 걷는 것은 감동스럽다. 건물 벽면을 – 항상 나를 한번 봐 달라고 대면하고 서 있다 - 벽돌로 치장하는 것 이상의 특별함이 배어난다. 여유가 많지 않은 공사비임에도 불구하고 방문자를 배려한 집의 얼굴이다. ‘바닥에 밟히는 얼굴’이라고나 할까?

 

이 앞마당을 지나서 더 안으로 들어가면, 잔디가 깔린 중간 마당이 나타나고, 이 중간마당을 지나가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안마당이 나타난다. 이 안마당에 안방과 별채가 서 있다. 일자로 뻗은 33미터 길이의 집과 우아한 선형을 가진 남측 전면의 산이 서로 만나, 즉 직선과 곡선이 만나 서로 조이듯 대치하는 틈새를 따라 3개의 마당이 만들어졌다. 깊이감은 겹이 진 곳을 하나씩 통과해 들어갈 때 느껴지는 법이다. 구중궁궐이 대표적이다. 이 건물은 물론 구중궁궐이 아닌 소규모 주택일 뿐이다. 하지만 산에 대응하는 쭉 뻗은 직선을 대치시키는 기하학적 포석을 통해 옥외공간을 분할하고 순차적으로 깊어지는 공간감을 구현해내고 있다. 마치 사랑마당에서 중간의 띠 마당을 거쳐 안마당에 이르는 한옥의 공간구성과 다르면서도 유사하다. 전면에 놓인 앞마당이 열어젖히는 개방감과 안마당이 풍기는 다소곳한 내밀함이 서로 균형을 잡으며 시끌벅적한 흥겨움과 고요한 명상 사이의 스펙트럼을 열어준다.

 

테이블이 놓인 앞마당, 식당의 전면창, 툇마루 등으로 구성된 동측 코너가 만들어진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대지의 동남쪽 부분으로 건축주 부부의 어머님이 살고 계시다. 동측 끝단의 섬세한 처리로 식당에서도 항상 어머니가 사시는 집이 보인다. 어머니도 항상 이 집의 존제를 확인하며 살아가고 계실 것이다. 주택에는 2세대가, 그리고 이 앞마당을 매개로 3세대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앞마당으로 그리고 식당으로 모여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같이 한다. 혹자는 ‘느슨한 동거’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느슨하든 끈끈하든 축복받은 동거이다. 이 동거를 가능하게 해 준 묘약은 주택의 동측 끝단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포착, 어머니의 집이 있는 곳에 좀 더 근접하고자 하는 열망을 담아 비정상적으로 기다랗게 늘어뜨린 박스의 고안, 그리고 코너를 따내는 등 두려워하지 않고 가한 기하학의 변형이다. 자연도 도왔다. 동측 끝단에 이르러 산세가 살짝 남측으로 물러서며 숨통을 틔워주고 풍성한 햇볕과 바람을 앞마당에, 식당에, 툇마루에 쏟아붓는다. 삶의 열망, 기하학, 터가 가진 기운 – 이 삼자 사이에 절묘한 조응이 이루어졌다.

 

완결성을 갖춘 단순한 기하학의 과감한 변형은 ‘터’의 형상, 향, 기운, 그리고 풍경에 대한 대응, 그리고 그 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열망에 대한 부응으로부터 나온다. 특히 삶의 열망은 놓쳐서는 안 된다. 어떤 방들이 필요한지, 어느 방을 어디에 놓을지, 어떤 방이 특별히 중요한지, 방의 형상, 향, 경계부 처리는 어떻게 할지 – 이런 질문들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재조직하고 변화를 주는 것으로 삶의 열망을 담고 있다. 이런 부류의 질문에 대한 답은 건축가가 혼자서 찾아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축, 생산, 미학을 망라하는 전문성을 갖춘 건축가라도 건축주의 삶의 소망, 내공, 지혜를 받아들이며, 재해석, 융화, 타협, 절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찾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모노로그(monologue)가 아니라 다이아로그(dialogue), 즉 진실이 내 편에 있다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과정 속에서 정립되어 갈 것으로 생각하는 전제 위에서 ‘나’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 되는 건축의 창작도 가능하다. 가채리 주택은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정치적 산물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삶의 열망과 공명하는 기하학’이다. 공장이나 실험실에서 거침없이 물품을 반복적으로 만들어 내는 생산(production)과 바깥과 끊임없이 대면하며 시스템을 수정하고 변형을 가해 절충하고 융화하는 창작(poesis)을 구분하고 싶다. 가채리 주택은 생산을 넘어 창작의 영역에 다다른 역작이다. 간결하고, 생산적이고, 과감한 형상을 유지하면서도 삶의 터에 뿌리를 내린 기하학! 이것은 항상 건축의 주제였다.